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핫피 엔도 (문단 편집) == 후일담 == 핫피 엔도는 결국 멤버들 간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해 1972년 말 해체하게 된다. 밴드의 두 축인 호소노 하루오미와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음악적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을 방문해 마지막 음반을 제작하자는 제의에 따라 3집 앨범 HAPPY END를 만들게 되는데, 이미 멤버들의 음악적 세계가 뚜렷해진 이후라 비틀즈의 [[The Beatles|화이트 앨범]]과 같은 [[옴니버스]]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 되어버렸다. 호소노 하루오미는 실험적인 성향이 강했다. 솔로 1집 는 완전히 포크로 회귀한 앨범이었고 그 이후 낸 <トロピカル・ダンディー>, <泰安洋行>, <はらいそ>는 당시 유행하던 트로피컬 사운드를 접목시킨 앨범들이었다. 이후 호소노는 사디스틱 미카 밴드의 드러머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키보디스트 [[사카모토 류이치]]를 끌어들여 일렉트로닉 그룹인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일명 YMO)를 결성하고 실험적인 전자음악으로 해외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문서 참고. 후에 YMO가 해체되고 나서도 꾸준히 음악활동을 해나갔으며 장르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과 교류하고있다. 물론 현재진행형. 오오타키 에이이치는 일찍이 상업음악의 저력을 알고 '나이아가라'라는 이름의 레이블을 설립한다. 나이아가라를 통해 [[야마시타 타츠로]], [[오오누키 타에코]], 사노 모토하루 등 재능있는 뮤지션들을 발굴했지만 음반이 잘 팔리지않아 경영의 난항을 겪는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사단 출신 야마시타 타츠로의 [[RIDE ON TIME]]이 크게 히트하면서부터 나이아가라 뮤지션들 역시 재조명 받으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경영자로 물러났지만 뮤지션으로도 간간히 활동해온 그는 전 동료인 마츠모토 타카시와 함께 <[[A LONG VACATION]]>[* 사실상 일본의 [[시티 팝]] 유행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앨범이며, 일본 대중음악 명반을 꼽을 때 절대 빠지지 않고 나오는 앨범이다.]과 을 발표해 큰 호응을 얻고, [[시티팝]]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두 앨범은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해 각각 오리콘 앨범 차트 2위와 1위를 기록한다. 이후 프로듀서와 [[CM송]]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1997년]], 12년만의 컴백을 선언하며 '幸せな結末(행복한 결말)'을 발매한다. 이 노래는 [[후지 테레비 월요일 밤 9시 드라마|게츠쿠]] 드라마 [[러브 제너레이션]]의 주제가로 사용되면서 아주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말년에는 야마시타 타츠로의 라디오방송에 간간히 얼굴을 비추다가 2013년 12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과를 먹다가 질식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 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 스즈키 시게루는 주로 호소노의 백업세션으로 활동했다. 뿐만아니라 많은 뮤지션들의 기타 세션으로도 활동해왔다. 여담으로 [[마약]] 투여 혐의로 인해 [[포니 캐년]]/킹 레코드 등에서 음반 판매가 중지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그 쪽에서는 이게 관행이라는듯.[* [[덴키 그루브]]의 피에르 타키가 코카인을 유통, 흡입하였음이 적발되자 덴키 그루브 앨범과 그가 출연한 게임, 드라마 등이 유통 중지 된 사례가 2019년에 있다.] 물론 유료 다운로드도 한동안 막혔다. 현재는 제재가 풀려 다시 구할 수 있다. 솔로 앨범인 BANDWAGON과 LAGOON은 명반으로 평가받으니 들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마츠모토 타카시 역시 세션 활동을 이어가며 특히 [[작사가]]로 활발히 활동했는데 특히 일본의 전설적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히트곡들을 많이 담당했다. 일부 곡에서는 작곡으로 참여한 호소노 하루오미 및 오오타키 에이이치와 협업하기도.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솔로 음반 작업에도 협업하여 상술된 과 이라는 일본 가요 역사상 길이 남을 명반을 함께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 외 [[콘도 마사히코]], [[나카야마 미호]], [[KinKi Kids]]의 곡들을 많이 작사했다. 요새 유명한 작사 작품이라면 [[성간비행]]이 있겠다.[* 2020년 9월 24일 [[주간문춘]]과의 인터뷰에서 20년 동안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고 밝혔다.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응답하라 시리즈로, '보지 않으면 인생의 손해'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https://youtu.be/ymn5I8ReEFI|영상]]] 이렇게 보면 호소노가 실험적인 성향이 강한 반면, 오오타키는 조금 대중적인 성향이 강한 것으로 보이나, 의외로 핫피 엔도 앨범을 들어보면 그 당시에는 호소노가 대중적인 포크 음악을 선호했고, 오오타키가 도전적인 하드 록 트랙들을 많이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둘 다 여러모로 밴드 시절과는 다른 커리어를 이어나간 셈. || [youtube(vzs-GbgCsz8)] || [youtube(5xvtYt7ZNmU)] || || 오오타키 에이이치 작곡의 [[바람이 부는]](風立ちぬ) || 호소노 하루오미 작곡의 [[천국의 키스]](天国のキッス) || ||<-2> 두 곡 다 작사는 마츠모토 타카시가 담당했다. || 멤버 네 명 모두 [[마츠다 세이코]]와 협업한 것으로 유명한데, 마츠모토 타카시는 마츠다 세이코의 1980년대 초반 전담 작사가로 활동할 정도였고, 호소노 하루오미, 오오타키 에이이치, 스즈키 시게루 모두 마츠다 세이코에게 곡을 제공했다. 마츠다 세이코의 4집 앨범 [[風立ちぬ]]는 아예 A 사이드의 5곡 전곡을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작곡 및 편곡을 담당할 정도였고, B 사이드 5곡 중 4곡은 스즈키 시게루가 편곡, 그중 '[[風立ちぬ#s-4.6|黄昏はオレンジ・ライム (황혼은 오렌지라임)]]'는 작곡까지 담당했다. 6집 앨범 [[Candy(앨범)|Candy]]는 A 사이드 B 사이드 양면 모두에 호소노와 오오타키가 사이 좋게 자신의 곡을 하나씩 제공해 총 4곡이 핫피 엔도 멤버의 곡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마츠다 세이코 외에도 [[마츠토야 유미]] 등이 핫피 엔도 멤버들과 두루 교류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담으로 핫피 엔도와 함께 이 도전을 했던 록 뮤지션이 한명 있는데 [[RC 석세션]]의 보컬이였던 이마와노 키요시로(忌野清志郎)이다. 이마와노 또한 일본 록의 역사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핫피 엔도가 자국의 언어로 스며든 따스한 포크록을 지향했다면 RC 석세션은 자국의 언어로 저항정신을 표출하는 방향성의 차이가 있었다. 두 밴드 모두 후배 록 밴드들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이 해체하고 1년 뒤인 [[1973년]], [[오다 카즈마사#s-2.1|Off Course]]가 메이저로 활동하게 되며, 일본 록은 대중 사이에 보다 넓은 지평으로 맥을 이어나간다. || [youtube(mBDttISCo2Q)] || 13년 뒤인 [[1985년]], 국제 청년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개최된 행사 'All Together Now'의 무대에 오르며 일시적으로 재결합하였다. [[도쿄]] [[신주쿠]]의 국립 경기장에 조성된 무대에 오르며, 핫피 엔도 시절의 곡을 [[뉴 오더]] 느낌이 나는 [[1980년대]] [[신스팝]] 풍으로 선보인 것이 특징. 아마도 호소노의 [[YMO]] 활동이 이러한 편곡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youtube(4s2UNfYqIT0)] [[2013년]]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사과]] 조각에 의한 질식사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밴드 멤버 전원이 모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나머지 세 멤버는 간간히 모이는 편인데, 오오타키의 장례식에도 세 멤버 전원이 참석했고 [[NHK]]에서 제작한 [[명반]] [[다큐멘터리]] 시리즈에 출연해 [[風街ろまん]] 제작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